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 천주교 박해 (문단 편집) === 가톨릭 책임론 === 조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사건이긴 하지만, 천주교 측의 책임이 있다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가톨릭 교회의 아시아 선교를 [[예수회]]가 주도하던 과거에는 선교지역의 전통이나 예절도 어느 정도 존중해 주었지만, [[청나라]] 선교를 둘러싸고 발생한 오랜 기간의 소위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A1%80_%EB%AC%B8%EC%A0%9C|전례문제 논쟁]]'의 결과, [[교황청]]은 [[도미니코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교식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아 금지시켰다. 문제는 그 시기에 [[한국천주교회|조선 천주교]]가 설립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에 온 선교사들도 제사를 폐하도록 가르쳐야 했다는 것. 조선 정부는 관혼상제를 중요히 여겼는데, 맨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양반 계층에서 조상의 신주를 태우는 행동을 그걸 집단적으로 행하였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가져왔다. 이는 조선의 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천주교를 믿지 않는 일반 백성들의 반감도 자아내었다. 서학(천주교)에 반대하며 전통을 수호하면서 사회를 바꾸자는 [[동학]]이 등장한 것도 천주교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도 박해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조선을 없애고 [[청나라]]의 지방이 되기를 자청하고, 그게 되지 않으면 외세를 끌어들여 신앙을 보장받는다는 발상은 실현 가능성은 없을지언정 조정 내에서 천주교 자체가 매국적인 위험한 사상인 것으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 사실 조선에서는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사회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정감록]]과 말세 민간신앙 등이 득세한데다 [[천주교]]까지 들어오니, 정부 입장에서는 내란 준동 행위를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민간신앙은 예전부터 크게 건드리지 않는데다 조선 이전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처벌 근거와 범위가 부족한데다, 내명부에서도 대비부터가 민간신앙과 [[불교]]를 믿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 그나마 만만하고 교세 파악이 쉬운 천주교가 대상이 되는건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가끔 청나라나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조선 내 포교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고, 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알게 된 조선 내 정세와 현재 사회 상황도 전달하였다. 전 세계 단일교단으로서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지니는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활동이지만, 조선에서는 이런 활동이 일종의 스파이 행위로 인식되었다.[* 실제 현재 [[중국공산당]]이 기독교 중에서도 유독 가톨릭에 적대적인 이유가 가톨릭은 [[교황청]]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인데, 중국 정부는 이를 외세의 개입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인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로즈 제독에게 [[병인박해]] 상황 보고를 하고 군대에 구출을 요청한 사실은 정말 수순에 따른 침략 레퍼토리다. 깽판을 치면서 역모를 선동하다 박해를 당하고 프랑스 함대가 그걸 명분으로 공격하고 이득을 보는 과정은 동남아시아 각국과 중국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되풀이된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 황사영 혼자 벌인 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당시 천주교 신부들은 이런 이야기를 신도들에게 으레 하고 있었다. 서양의 군함이 와서 천주교도들의 세상이 올거라는 이야기는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 청에서도 현지인들에게 하고 다녀서 황사영 백서 사건 역시 그 강하다는 배 빨리 보내주기를 바래 쓴 일이다. 조선의 사례는 아니지만, 베트남의 식민지화에 있어 베트남 사제들이 프랑스 병사들을 약속한 '''천병'''이라 선동하여 베트남 천주교도들을 동원해서 점령하고 베트남인 천주교도들을 특수 계층화하여 베트남을 식민지배했으니, 이 쪽은 사제들이 헛소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세를 모아오고 있었으니 [[신축민란]]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이 해방 이후에도 주도권을 장악하고 베트남 불교도들을 탄압하다[*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은 국민 다수가 믿는 불교를 배척하고 가톨릭만 옹호했다.] 민심을 잃고 월남전에 패한 원인 중 하나가 되는 등 현대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행동이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가 제국주의의 첨병이 아니라는 주장도 카톨릭 교회측의 일방적인 주장인데, 애초에 설립과 인선을 모두 프랑스 왕이 했고, 예수회를 이단으로 몬 것도 프랑스 툴루즈에 본산이 있는 도미니크회가 프랑스 왕의 사주를 받고 벌인 일이다. 당시 교황청은 [[사코 디 로마]]를 당한 이후라 신성로마제국에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남하를 견제하고 있는 프랑스에 군사적, 재정적 의존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예수회 해산 및 관구이전 요구를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당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해당지역의 기득권을 가진 포르투칼은 나라가 스페인에게 흡수당했다가 독립하는등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상태라 교황청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전교회가 1822년 이후 재정적 독립을 했다는 말로 가리고 있지만 그건 그 이전의 이야기를 숨기는 말로, 설립과 사제인선도 전부 프랑스 왕이 했고 재정지원도 프랑스가 전적으로 책임졌다. 원주민 국가도 아니고 프랑스 함대로 마카오를 침략할때 현지 포르투갈 군인들이 저항하자 이들에 대해 파문 위협을 하면서 포르투갈인 사제들에게 순명하라고 명령했지만, 포르투갈인 사제들은 파문을 감수하고 포르투갈 군인들과 함께 농성하여 마카오를 지켜내었다. 사실상 프랑스 군의 일개 조직처럼 움직였고 재정적 독립 이후에도 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때문에 프랑스 함대는 동아시아 천주교 역사에 뻔질나게 나온다. 재정적 독립도 하고 싶어서 한게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 정부가 왕의 수족과도 같은 카톨릭 교단을 [[라이시테]]로 숙청하면서 교회 군대에서 추방되고 미사금지령까지 얻어맞아가며 독립되어진거다. 제장작 독립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행적은 달랐냐하면,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카톨릭과 화해한 이후부터는 이전과 똑같았다. 프랑스 혁명제정이건 부르봉 복고왕조건 프랑스 제2공화국이건 나폴레옹 3세황제건 식민주의적 정책은 동일했고, 군대를 들먹이면서 현지정부를 협박하는 방식으로 전도하는 것의 편리함을 전교회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은 그나마 러시아와 일본의 견제로 몇번 찔러본 것에 그치기 때문에 악감정이 덜하지만 몇안되는 빅해사건 문서마다 프랑스 신부, 함대가 거론되지 않는 일이 없고, 일제시대엔 친일논란이 있고 1차대전때는 프랑스 편을 드는등 좋은 모습은 전혀 보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프랑스에 식민지배당한 베트남과 캄보디아등 동남아지역, [[청프전쟁]]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직접 프랑스와 싸운 중국에서는 이론의 여지없는 원수로, 천주교인은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 전쟁명분을 만들고 전쟁도중에 천주교인들을 동원함에 있어 전교회가 저 사건들에 책임이 없다고는 절대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도 문제인데 그렇다고 천주교 사제들의 질은 좋으냐 하면 그것도 애매하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전국시대~도쿠가와 막부 초 시기까지 일본에서 활동한 천주교 사제들은 '''노예무역'''에 가담했고[* 그냥 가담한 것도 아니고 이에 대한 힐난에는 판매하는 사람(일본인 인신매매상)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헛소리까지 했다. [[수요와 공급]] 원리를 보면 알겠지만 '''수요가 생기기에 공급도 생긴다.''' 물론 이전부터 일본은 인신매매나 노예매매가 많긴 했지만 그래봐야 이들은 '공급'이다. 실제적으로 이들을 사들인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은 '수요'인 셈인데 이쯤되면 카톨릭 신부들이 여기에 가담한건 넌센스다.] 조선에서도 제주도의 카톨릭 교단은 제주도 토착민을 상대로 살인, 강도, 강간 같은 행위를 저질렀고(셋 다 십계명에 금지되어 있다!) 이를 말려야 했을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들은 오히려 '''교인들만 감싸고 돌았다.''' 거기다가 봉세관은 이들 카톨릭 교도를 용역깡패삼아 토착민들을 착취하기까지 했고 결국 신축민란이 일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실 어떻게 보면 천주교 쪽이 초기 대응을 잘못한 측면도 없잖아 있긴 하다. 일반 민중은 몰라도 천주교가 초기엔 상류층 위주로 퍼졌다는 걸 감안하면 상류층 신도도 많았을텐데 그러면 진산 사건 1년전에 내려진 교황청의 제사금지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 진산 사건으로 조선 정부는 확고하게 제사를 일부러 안 지내는 것을 사형으로 다스려 일반 민중 입장에서도 제사 금지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부터 신유박해까지 10년이란 시간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기간동안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일어난 사학의 일종으로 보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적극적인 탄압은 않는 자세를 취했기에 이 10년은 천주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었다. 아닌말로 나중에 천주교 관련으로 처형되는 이승훈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삭탈관작이 된 적도 있는 사람이고 이 사람이 그냥저냥 천주교 신자1이 아니라 '''조선인 최초로 정식 세례까지 받은 인물'''이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의 신앙적 조직력 역시도 '''자체적으로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어 정식 신부를 보내줄 것을 청하고 또 그것을 성공시킬 정도'''로 꽤나 강했다. 괜히 진산 사건에서는 두 주모자인 윤치중, 권상연이 '''어떤 심문에도 태연하고''' 신유박해 당시 끌려온 이들도 마찬가지였던게[* 많은 이들이 순교를 택했고 간혹 배교하겠다고 말한 이도 있지만 이내 번복하여 순교한 사람도 있었다.]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험과 조직력을 놓고 '''10년이나''' 아무런 대책도 못 내놓은 것. 물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하상(정약종의 아들)의 경우에도 이 문제를 두고 조정측이 가진 천주교에 대한 인상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그 또한 아버지처럼 순교했다. 물론 정하상의 노력은 실록에 실리지 않고 단지 그가 참수당한 사실과 그의 간략한 행적만이 실려 있기에 알려지지 않았지 천주교 측에서도 나름의 노력을 한 흔적이 있을 순 있겠지만 일단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신유박해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조선은 진산 사건때 공식적으론 천주교를 믿는다고 박해한 게 아니라 제사를 걸고 넘어졌기에 대놓고 제사를 부정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10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신유박해에서는 공식적으로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문제는 이미 조선은 10년전 사건으로 천주교를 탄압할 명분이 있었고 우연찮게 걸린 무부무군까지 있었기에 천주교는 외통수 상황이었다. 애초에 조선 입장에서는 '먼저'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건국 때부터 유교를 중심이념으로 삼고 그렇게 300년 넘게 이어져온 나라에서 제사를 '일부러' 안 지내는 쇼킹한 모습을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비단 조선만이 아니다. 조선 이전에도 고려시대, 남북국 시대, 삼국시대 모두 형태는 달랐겠지만 제사는 지냈다. 즉 제사를 지내는 것을 그러는게 옳고 또 당연한 상황에서 사정이 안 되어서도 아니고 일부러, 그것도 신념 때문에 안 지낸다는 것을 보고 쉬이 납득할리가 없다. '''그런 집단을 아직까지 못 보았으니까.'''][* 조선이 얼마나 제사를 중요시했는지 예시를 들어보면 조선의 구휼 정책 중에는 워낙 가난해져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게 된 양반들을 지원하는 것이 있으며 봉제사접빈객이라고 양반들의 2대 의무가 제사와 손님 접대였다. 손님 접대가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임을 감안하면 제사는 그 손님 접대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행위였던 것이다.] 하다못해 조선은 천주교에 대해서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어딘가에서 생겨난 사학, 불교의 별파 정도로 판단하고 있을 정도로 천주교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즉 일단 첫 박해까지는 조선의 천주교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퍼지는 것에 권력층의 기여는 전혀 없어서 베트남, 일본, 중국처럼 포교를 허용했다가[* 공식적 허용까지는 아니라고 치더라도 세 나라 모두 카톨릭이 들어온 초기에는 그 나름대로 카톨릭 세력에게 도움받거나 한 것도 있어서[* 베트남은 응우옌 왕조 건국에 서양세력이 힘을 보탰고 일본은 서양세력들이 조총 등을 전파하였으며 중국은 서양 신부들이 시헌력을 만드는 식으로 활약했다.] 박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해하게 된 이유도 세 나라 모두 비슷한 면이 있다.] 금지한 것도 아니다. 결국 천주교가 박해를 피하려고 했거든 진작에 불효자, 불충 인식을 걷어낼 수 있을만한 노력을 해야 했고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늦게라도 적극적인 반박을 해야 했다. 근데 반박이 아니라 황사영 백서 사건처럼 반역으로까지 비칠 수 있는 초대형 사건을 일으켰으니 그게 문제다. 괜히 [[마테오 리치]]가 유교를 인용해가며 천주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다. "무조건 내가 맞고 네가 틀려" 라고 하는 것보단 "네 말이 맞고 네 말에 따라 내 말도 맞아" 라고 하는 게 상대방 기분에는 좋을 것이다. 일본의 [[카쿠레키리시탄]] 역시도 탄압 회피용이긴 했지만 성모 마리아상을 불상처럼 제작했고 기도문에 음율을 붙여 불경처럼 보이게 하는 등의 면모를 보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현지화가 너무 이루어지다보니 기존의 교리마저도 크게 뒤흔들리기도 했다. 가령 원죄가 삭제되기도 했고 아담의 자녀들끼리 자식을 낳았다며 [[근친상간]]이 대놓고 명시되었다.] 현대에도 [[현지화]]는 흔하게 일어나는 걸 감안하면 결국 종교라는 특징을 감안하면 그래도 본류는 지키되 본류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현지에 맞출 노력이나 본류가 현지와 괴리되지 않는다고 어필하는 것은 안정적인 존속을 위해선 필연적이었다. 안 그러면 그 결과인 신유박해와 같이 '진산 사건', '무부무군' 등을 보며 '아 이놈들은 불효막심한 패륜아에 불충한 자들이구나' 라고 판단하는 조정의 판단을 되돌릴 수가 없다. 재판으로 치면 피고로 기소되었는데 판사가 증언 기회를 직접 준 것은 아니라도 아얘 증언을 못하게 한 것도 아니고 증언할 시간이 없던 것도 아닌데 증언을 아얘 안 하다가 유죄 판결이 나오자 판사에게 이를 간 격이다. 무죄라 하고 싶어도 피고로 기소된 측의 말을 들어봐야 내리지 정황증거(진산 사건, 무부무군)는 유죄라고 말하는데 피고는 입을 안 여는 상황인데 어떻게 무죄를 준단 말인가. 뭐, 천주교 쪽에서도 나름대로 조정의 부모도 조상도 모르는 패륜아 인식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사건의 임펙트가 너무 컸고 정작 이 지경이 되도록 천주교 측에서 조정이 납득할만한 무언가를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황사영 백서 사건은 이런 워낙 깊이 박힌 패륜아 인식에다가 외세와 내통하는 반역자 놈들이라는 인식까지 더해져서 더 심하게 박해받는다. 아닌 말로 조정측의 천주교 박해가 심한 수준인 것도 사실이지만 로마의 [[기독교]] 탄압은 그 박해 정도가 더 심하고 또한 잔혹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인들이 당시 로마의 주 적국인 파르티아나 사산 왕조를 끌어들이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페르시아계 기독교인이 있긴 했지만 당시 파르티아나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 위주였기에 크리스트교인들이 손잡을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나마 이 당시 사산 왕조는 로마와 사이가 나쁘고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편이긴 했다만 여기도 기독교 때려잡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애초에 아무리 그래도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사산 왕조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집단이라면 콘스탄티우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해줬을까? 아니, 당초에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란 말'''을 누가 했는지 떠올려보자. 모든게 말하란 대로 될 수는 없지만 황사영 백서 사건은 왼뺨을 내민 것이 아니라 불량배 고용해서 상대방의 양뺨을 날려버리려고 한 격이다. 이러니 상대방 입장에서도 곱게 보일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조정이 천주교 말살을 꾀했냐면 일단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까지는 주체인 정순왕후나 노론은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까지는 정적 숙청이 목표였기에 이 시기까지 공식적으로 사형된 천주교인들은 '''50명'''뿐이다. 물론 이 50명에는 주요 인물들이 많았기에 천주교인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긴 하고 병오박해와 비교해봐도 적은 숫자는 아니긴 하다. 허나 신유박해때는 애초에 본격적인 탄압을 안 했다가 시작한 것이고 병오박해는 이미 두 번이나 지나가서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근데 이 상황에서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지니... 괜히 같은 천주교인인데도 정하상이 그를 두고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라고 디스한게 아니다. 거기다 [[병인박해]] 시점은 베트남이 천주교 박해했다고 쳐들어가 프랑스가 식민지로 전락시킨 시기(1858년)으로부터 '''10년도 안 지난 시점이다.''' 탄압을 조정이 먼저 벌이고 병인양요, 도굴 사건이 벌어진 것이지만 신유박해처럼 '''나 반역자요''' 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듯한 행위를 저지른 것도 천주교이다. 그래도 먼저 조선에서 박해를 한 것이니 천주교에 책임을 묻는 건 말같잖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조선과 유교는 토착 세력, 천주교와 서양 열강은 외부 세력인 만큼 외부 세력이 토착 세력 사이에서 뿌리뻗으려면 싫어도 토착 세력에게 잘 보이려고 해야 하는데[* 정 이게 싫거든 '''기존 토착 세력을 엎어버리면 된다.''' 가톨릭의 시도는 이쪽으로 볼 순 있긴 한데 그렇다고 이러한 방법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서로 충돌할 여지가 있을 뿐 아니라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박해를 한다고 나라를 팔아먹고 왕족 무덤을 도굴하는 지금 기준으로도 경악스럽지만 그 당시로서는 더 경악스런 범죄를 저지른 것[* 일례로 고종 시기에 세계순방에 나선 보빙사 일행은 이집트에도 방문하여 피라미드를 구경했는데 당시 피라미드는 등반 및 탐사가 유행이었음에도 이들은 남의 무덤은 함부로 밟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수천년 전이라고 해도 왕의 무덤이니 유행이라도 그건 아닌 거 같다며 거절했다. 무덤을 밟는 것조차 이 정도이니 도굴은 말할 것도 없다. 하다못해 [[오자서]]도 [[굴묘편시|자기가 도굴한]] [[초평왕|왕릉의 주인]]이 자기 가족을 몰살시킨 왕임에도 그럼에도 그 행위는 비판받고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떳떳한 일이라 여기지는 못했다.]이니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만일 조선이 박해 없이, 혹은 일찍 천주교를 허용해줬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먼저 '''조선의 근간사상인 유교가 흔들린다.''' 유교는 조상 공경을 중요시하며 따라서 제사를 중요시하는데 천주교를 허용하는 건 제사 안 지내도 된다는 것이고 그럼 다시 조상 공경을 중요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가 되며 이는 다시 유교 부정으로 이어진다. 착각하지 말하야 하는 건 '''조선은 민주공화정 국가가 아니라 전제군주정 국가다.''' 다양한 요소들의 '''공존을 인정'''하며 그래야 한다고 하는 대한민국과는 달리 조선은 유교를 근간으로 한 국가며 불교나 민간신앙도 어디까지나 유교적 질서에 도전하는 세력이 아니니까 공존이 가능했던 것이며 그나마도 불교는 유교와의 여러 차이로 천시되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불교와 민간신앙은 대체적으로 조선체제를 인정하고 유교 우위도 인정하는 등 숙이는 자세로 나왔기에 조선도 이들을 말살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보우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승려를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 사상 자체도 도저히 유교와 공존하기 힘든데다 자기네들끼리 쉬쉬하며 한다면 모를까 [[진산 사건]]을 보듯 너무 공개적으로 드러내버렸고 정약종의 '무부무군'에 황사영의 백서사건 등 조선은 기존의 체제유지를 위해선 천주교를 박해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어버렸다. 현재로 치면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며 날뛰는 이들을 묵과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셈.[* 이것과 관련하여 비슷한 집단은 [[통합진보당]]으로 내란 음모를 꾸미다가 해산당했다. 웬만한 경우 진보정당과 관계가 마냥 나쁘지는 않은 민주당계 쪽에서도 이 때는 정당의 자유가 훼손되었다는 등의 말은 했지만 이들도 이전부터 통진당에 문제가 있는건 인정했고 때문에 해산 결정에는 동의했다.] 심지어 황사영 백서 사건과 병인양요 등은 체제 정도가 아니라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묵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이후 조선이 천주교를 공인해줘서 망한 건 아니다. 조선의 멸망과 천주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조선이 천주교를 무작정 허용해줬다면 조선 체제에는 심각한 위협을 가져왔을 것이다. 유교가 흔들리니 유교를 통해 권력을 누려온 양반집단이 흔들릴 것이고 이들에 의해서 천주교 공격이 일어났을 것이고 결국 '''천주교를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어도 사적인 박해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다''' 왕도 기존 기득권 집단인 양반들의 지지를 받아 통치를 하는데 이들의 반발을 애써 무시하거나 하면 '''이들이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에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그 대안으로 [[개화파]]를 양성하면 되지 않겠냐 싶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양성된다고 해도 그 수는 적을 것이고 [[개화파]]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들 역시도 국가나 체제유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경우에는 이를 단행한 세력은 이미 국가를 경영할만한 충분한 능력과 역량을 갖추었고 정치적으로도 큰 힘을 갖고 있었지만[* 이들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그 일본 군부조차도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군부가 힘을 키운건 이들, 즉 원로들이 서서히 죽어서 공백이 생기면서부터다.] 개화파는 경력도 경험도 짧았지만 자기가 본 것대로만 따르는, 자기만의 무언가가 부족했다. 결국 천주교를 순순히 공인해줬다고 조선에게는 딱히 이득이 없는 셈. 서로 어떻게든 조율점을 찾아보려고 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교황청에서 제사 금지를 풀어주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이다. 실제로 조선은 천주교가 17세기에 이미 들어왔고 18세기 후반에는 신앙으로서 받들어지지만 그래도 한동안 조선 조정과의 마찰이 없었다. 그러다가 1790년에 천주교에서 제사를 금지한 것이 조선에 알려지고 이 때 제사 금지에 반발한 신도들은 일제히 배교했고 남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이어나가다 '''소식 들린지 1년 만에 최초의 박해사건이 터진다.''' 결국 정말로 조선에서 아얘 천주교와 공존할 생각이 아애 없었다기보단[* 물론 조선이 천주교를 이전부터 좋게 본 건 아니었다. 체제공이 저놈들은 아비를 천주(하느님), 조화옹(예수) 다음인 세번째로 높다고 여기고 남녀간의 정욕이 없는 자를 정신이 응집되었다 하여 교주로 삼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고 불교처럼 허황된 소리를 일삼는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박해로 이어지진 않았다.(진산박해 3년 전 일이다.) 즉 좋아서 공존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박해할 만큼 위험분자로 보진 않은 것. 그리고 체제공도 천주교를 가열차게 비판했지만 이 말의 전체 내용은 '사학 중에 간혹 좋은 것도 있는데 그 중에 천주교란 애들입니다. 그런데 개네가 (앞서 말한 내용들)을 하는 거 보니 폐해는 클 듯합니다' 였다. 심지어 진산박해가 일어나던 시점에서도 천주교를 가열차게 비판하지만 그래도 원래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자는 본뜻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결국 천주교를 마냥 마녀사냥마냥 나쁘게 보았다기 보다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나쁜 것이 더 많아서 나쁘게 보았다 정도로 여기면 좋을 듯하다.] 천주교 쪽에서 먼저 그럴 여지를 없애버린 것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